Episode 74-1. 오랜 날과의 안녕 (1)
최전선에 나서는 동료를 보며 서연우는 오랜 과거를 반추했다. 그러자 뻔한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전장을 무대로 뻔한 하루가 재차 조명됐다. 조명된 전장 아래로 의문이 일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전장인가.
답을 찾으려 지난 날을 다시금 기억하며, 단말의 파편을 이으려 애써본다. 그리 애썼음에도 되돌아온다. 보잘것 없는 삶으로.
그렇게 별 볼 일 없는 삶을 산 이는 그 삶을 외면하는 것으로 하루를 연명했다. 그렇다면 그 연명의 의미는 지금도 유효한가.
아니.
서연우는 자신의 질문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면 무효한가.
아니.
다시 한번 고개를 내저었다.
결코 유효하지도, 무효하지도 않은 삶. 서연우는 굳어 있던 제 발을 떼어 힘겨이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그 걸음에 수만 대군의 시선이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시선 속에서 다시금 한 발자국을 딛었다. 숨이 멎는 듯한 정적. 어쩐지 간만에 느껴지는 고요에, 이번엔 숨을 내쉬었다.
숨소리만이 울리는 듯한 적막. 그 적막을 뚫고 고개를 처들자 아득한 전장이 눈에 담겼다. 끝이 보이지 않을 거 같은 발키리의 대군과, 그들의 수장으로서 서 있는 슬픈 우리엘의 인영. 그 중심에 한수영이 있었다. 너무 멀어 닿지 않을 듯한 거리. 그 까마득한 거리를 두고 전선에서 그녀가 싸우고 있었다. 그녀의 설화 하나하나가, 악착같이 발악하고 있었다.
아.
유효하지도 무효하지도 않은 삶.
그렇다면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가는가.
그래.
서연우는 제 마지막 질문에,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기에 지금. 오래도록 외면해 온 엑스트라는 그 배역에 저항함으로서 살아 숨 쉬기를 소원했다. 선을 원한다면 선을 주고, 악을 원한다면 악을 줄 것이며, 살을 원한다면 그리할 것이다. 밟고 올라선 전장에서, 기어코. 그 생각에 우습게도 웃음이 났다. 들리지도 않을 웃음에 선이 밟혔다.
[당신이 선택한 진영은 '악'입니다.]
멀리서 자신을 향해 소리 치는 인영이 보였다. 곧 그녀와 무언의 인사가 닿았다. 별 볼 일 없는 인사였다. 고작 안녕. 한마디에 불과한 단어. 그럼에도 서연우는 개의치 않았다. 동요하지 않았으며, 더이상 고집 부리지도 않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향해⋯]
[성좌, '방주의 주인'이 —]
[절대선 계통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에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선을 놓자 무수한 메세지가 부지불식간에 동발했다.
그리고 그 무수히 떠오르는 이야기를 읽으며, 선을 고집했던 오랜 변방의 이야기 또한 끝내 결을 맞이했다.
그러니 이건, 지난 날과의 작별 인사다.
동료를 따라 선 최전선. 그 전선에서 퇴색된 전장을 무대로 카이제닉스의 무대화舞臺化가 일었다.
하나의 삶에서 기승전결을 함께한 이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하나둘씩 연호하기 시작했다. 억겁의 시간과 윤회의 반복에서 자신들을 믿고 따라준 이들이, 전장 위에서 저 오만한 별들을 상대로 다시 한번 반역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중심에 삶이 있었다. 위선에 불과했던, 이전의 이야기.
한때 선을 고집하여 악을 외면했던 이는, 위선의 한계를 앎에 따라 선을 포기하고 선천적 악을 택했다. 그런 선천적 악은 곧 위선에 의거해 혼탁하게 섞이고, 그것은 더이상 선도 악도 아니다.
[설화, ‘변방의 엑스트라’가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고 떠납니다.]
[옭매던 설화가 이음새를 찾아 떠납니다.]
[지금부터 ’혼돈‘ 은 당신의 편이 되길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본연의 위선과, 선천적 악. 그 안에서 깨어난 혼돈이 그녀의 눈에서 물결 치고 있었다. 낯선 황금빛이 일렁거리는 동공 사이로 전장의 광경이 울렁거렸다. 시야가 검붉게 파도 쳤고, 그와 동시에 포말이 일었다. 또한 동시에.
익숙한 시선과 마주 닿았다.
그래.
[화신 ‘서연우’의 특성 진화가 임박하였습니다.]
[특성 진화의 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결국 바뀌는 것은 없더라도,
기어코 남은 이들이 있는 한.
[당신은 ‘배역을 반한 자’입니다.]
적어도 같은 선택을 하진 않는다.
그러니, 이 이야기도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눈을 감았다. 그러나 감지 못했다. 그랬기에 감지 못한 눈으로 전장을 또렷히 응시했다. 그러자 전장을 응시하던 익숙한 눈과 또다시 마주 닿았다. 언젠가 얻었던 [독과 백의 간극] 설화. 그렇게 더이상 외면할 수 없어진 존재를 옆에 두고, 둘은 시야를 앞으로 고정했다. 한수영이 고개를 끄덕였고, 서연우가 그에 응했다.
[설화, '독과 백의 간극'이 묵은 이야기를 청산하고자 합니다.]
[설화, '오랜 날과의 인사'가 깊이 감응합니다.]
그렇게 한 사람의 발자국이, 앞 사람의 것과 포개어졌다. 다시 한 걸음. 번복은 없다. 반역을 꾀한 이는 여전히 앞을 바라본 채로, 전장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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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날과의 안녕